피해자

 

MBC와 KBS 파업이 곧 있으면 두 달째로 접어든다. 지난한 싸움이다. 정치적인 대의가 있는 숭고한 일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월급이 끊긴 생활을 이어가야 하는 고달픔도 있다. 자리를 꿰어차고 있는 사장들은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고, 시민의 시선에도 지난 9년간의 피로감이 묻어난다.

제대로 된 이유도 알지 못한 채 많은 사람들이 업무에서 밀려났다.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사프로그램 PD는 갑자기 스케이트 장으로, 사회 문제를 파헤치던 기자는 심의실로 가야 했다. 아나운서는 마이크를 단 1초도 잡을 수 없었다.

“인생 자체가 완전히  뒤틀려버렸다”

라고 이야기했다. 누가 이들을 업무에서 밀어냈을까.

최근 방송된 “그것이 알고 싶다” 1097회에서는 이 모든 것의 ‘몸통’을 추적해 들어간다. 그들은 참으로 치졸하고 유치하게, 동시에 아주 치밀하게 반대 세력을 제거해 나갔다. 수족처럼 움직일 수 있는 사람에게는 많은 돈과 권력을 주고, 그들을 이용해 귀찮은 녀석들의 입을 노골적으로 막아버렸다.

어찌 그럴 수 있는가 싶지만, 세상에는 그럴 수 있는 사람이 너무 많다. 그렇게 권력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 얻어맞고, 다른 편에서는 득세하는 모습을 보고난 후 더 많은 사람들이 따라하게 되었고, 결국 이 어이없는 흐름은 가속화되었다.

MBC와 KBS가 망가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졸속 합의로 미국산 소고기가 들어와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광장에 나선 날도, 4대강에 녹조가 가득 낀 날도, 현직 대통령의 불법 사찰에 대한 증거가 드러난 날도, 그들은 비오는 날일수록 소시지 빵이 잘 팔린다느니, 도다리 쑥국이 어쨌다느니 하는 시덥지않은 뉴스만을 반복하며 그 모든 것들을 없던 일로 만드는데 일조했다. 덕분에 권력은 더욱더 뻔뻔해졌다.

시민들도 언론을 외면했다. 그깟 티브이 안보면 그만 아닌가.

그러던 어느 날 진도 앞바다에 배가 하나 가라앉게 되었고 많은 사람이 물에 빠졌다. 물에 빠져서 죽어가고 있는데 언론은 “전원 구조”라느니 “사상 최대 물량 투입” 이라느니 사람들의 눈을 가리려고 노력했다. 속이 타는 부모들은 직접 배를 빌려 아무도 없는 바다를 찍으며 울부짖었다. 보도하지 않았기에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깟 티브이를 안보게 되니 사람들이 알게 될 길은 점점 없어지게 되었다. 그렇게 권력은 사람들의 눈과 귀를 막아버렸다.

“망가져버린 언론의 피해자는 여러분이 아니다. 바로 예은이 아빠인 나다.”

지지 연단에 서서 울부짖은 아이 아빠가 한 말이 뇌리에 남았다. 자식을 바다에 묻은 부모의 마음이야 헤아릴 수 조차 없는 것일테지만, 피해자는 그들만은 아닐 것이다. 억울하게 스케이트장으로 밀려난 PD와 물을 잘못 틀어서 마이크를 빼앗긴 기자 역시 피해자이다. 당장 월급이 끊겨 힘들어진 가구의 구성원들도 피해자들이며 심지어는 파업으로 결방된 무한도전을 보지 못하는 시청자 역시 사소한 피해자들이다.

피해자는 이렇게 많은데 아직도 가해자는 없다.

아니, 우리 모두 알고 있지만 아직 알지 못한다.

알리오 올리오

알리오 올리오를 해 먹어보기로 했다. 파스타가 의외로 간단한 음식이라는 것은 들어서 알고 있지만 사실 해 본적이 없었기에 나에게는 미지의 영역이었다. 지난 해부터 레시피를 보아가며 이런 저런 요리를 만들어왔기에, 이제는 한번 시도해 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같은 팀에서 일하던 엔지니어가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나에게 조리 도구를 다 주고 가서 뭐라도 만들어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알리오 (aglio)는 이탈리어 어로 마늘이라는 뜻이고, 올리오(olio)는 기름이다. 그러니 말하자면 기름과 마늘로 만든 파스타가 되겠다.

조리 방법은 굉장히 간단하다. 우선 냄비에 물을 적당히 붓고, 소금과 올리브 오일을 적당히 뿌린 후 끓인다. 물이 끓어오르면 면을 500원 동전 만하게 말아서 (이것이 1인분이다) 삶는다. 보통 1.6미리 면이라면 6분 정도 끓이면 적당하다고 하는 것 같다. 취향에 따라 더 삶을 수도, 덜 삶아도 좋겠다.

면이 준비되면 이젠 마늘을 썰 차례다. 다지는 편이 기름에 마늘 맛이 잘 배는 편이라고 하지만, 편마늘로 써는 것이 어쩌면 더 정통일 수 있겠다. 나는 집밥 백선생에서 배운 대로 대부분은 다지고, 편마늘은 모양을 내는 용도로만 사용한다. 마늘은 보통 중간 크기의 깐마늘 (일본은 왠지 모르게 깐마늘이 없다) 5-6개 정도 쓰는 것 같다. 그리곤 페페론치노 고추를 두개 정도 적당히 썰어 놓는다. 씨까지 같이 넣는 것이 포인트.

그렇게 재료가 준비되면 팬에 올리브 오일을 넉넉히 두른다. 백종원의 설명에 의하면조금 과한가싶을 정도가 좋다고 하는데, 나는 너무 많이는 넣지 못하고, 서너번 정도 팬에 오일을 붓는다. 불을 켜고 바로 재료들을 투하하는데, 가끔은 베이컨을 사서 같이 볶기도 한다. 기본적으로 맛이 심심하기 때문에 고기 종류가 꽤 잘 어울리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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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볶다 보면 마늘의 색이 갈색으로 변하는데, 말하자면 좀 먹기 좋은 색이 되는 것 같다. 이 때 준비한 면을 팬에 붓고 같이 볶으면 된다. 그리고는 면을 삶은 물(면수)을 조금씩 부어가며 볶으면 된다. 이렇게 하면 완성이다. 

처음 두 번까지는 ‘대체 이게 무슨 맛이지’ 싶었다. 일단 모양은 알리오 올리오 같긴 한데, 막상 먹어보면 아주 심심한 면 맛만 났다. 종종 같이 시시엔에서 고기를 구워먹는 멤버인 히데상의 조언에 따르면, 우선 오일에 마늘 맛이 충분히 배도록 잘 볶아주고, 그리고 그 오일이 면에 잘 코팅되도록 하는 것이 핵심이라고 한다. 따로 간을 하지 않는 음식인 만큼, 재료 본연의 맛을 잘 살려야 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어떻게 코팅을 해야 하나 고민했는데, 코팅을 해야겠다고 의식을 하고 이리 저리 젓가락질을 하다보니 면에 기름이 입혀지는 것이 조금은 보이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해서 먹은 파스타는 이전보다는 훨씬 나았다. 전과는 달리 조금 고소한 맛이 났다.

아마도 다음에는 이걸 베이스로 봉골레를 해 볼 것 같다.

8/6

미국을 떠난지 한달이 조금 넘었다. 해외 지사에서 근무하게 되면 잦은 출장은 피할 수 없는 일이 되기 때문에 미국에 다시 돌아갈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다시 돌아간다고 하니 좀 기분이 묘했다. 작별 인사도 하고, 짐도 다 정리했는데 멋쩍게 다시 돌아가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생각해보면 내겐 유독 그런 일들이 많았다.

미국은 당연하게도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다. 짐을 풀고 나니 오후가 되어 가볍게 스탠포드로 산책을 하러 갔다. 한번 살아서 그런지 여행지에서 느끼게 되는 조급함이나 피곤함이 없어지고, 조금 여유가 생겼다. 살기 전에는 출장을 오면 어딜 갈 생각은 하지 못했던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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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가 호텔이라는 점을 빼면 지난 1년 동안 여기서 보냈던 일요일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익숙하게 들르던 곳을 아무렇지 않게 들러 필요한 것을 사다보니 도쿄에서의 긴 출장을 마치고 집에 온 느낌이 들었다.

자주 가는 한국 마트에서 떡볶이와 김밥을 사면서 “그 동안 안보이던데”, “아니 왜 이렇게 오랜만에 왔어요” 같은 소리를 듣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의외로 일주일에 한번 가던 때와 다를 바 없이 “맛있게 들어요” 만 듣고 왔다. 살 때에는 꽤 자주 가서 떡볶이도 공짜로 받곤 했는데, 한 달간의 공백이 전혀 크지 않았던 것일까. 아니면 주인이 특색없게 생긴 나를 금방 까먹었을지도 모르겠다.

밥도 먹고 산책도 했는데 시간이 남아 뭘 할까 궁리하다 영화를 보러 가기로 했다. 일본에서는 덩케르크가 9월에나 개봉하기 때문에 여기서 보기에 딱 좋은 영화였다. 호텔 주변에 영화관이 꽤 많았지만, 늘 보던 (예전) 집 근처의 Century 20 Great Mall로 갔다.

예전 집을 들러보겠다는 센치한 이유도 없진 않았지만, 그보다 이 영화관이 드물게 지정 좌석과 리클라이닝 시트를 구비한 곳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굳이 이곳으로 갔다. 보통은 선착순이라 일찍 도착해서 자리를 맡아야 하지만, 여긴 조금 느지막히 영화를 보러 가도 문제 없이 영화를 볼 수 있다. 호텔에서 잠깐 조는 바람에 10분 정도 늦었지만, 상영 시간 초반 10분 이상은 광고를 트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음료도 하나 사고 여유있게 입장했다. 심지어 사진도 한 장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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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까지 보고 나니 밤이 되었다. 말 그대로 언젠가 여러번 반복되었을 평범한 일요일 하루를 보낸 셈이다.  익숙한 길을 따라 호텔로 돌아갔다. 늘 가던 길이라 네비게이션 한번 켜지 않고 돌아다녔다.

그렇게 모든 짐을 버리고, 많은 걸 놓고 도쿄로 갔는데, 막상 돌아오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범한 주말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루 동안 느낀 생경하지만 친숙한 감정에 어쩐지 허탈해졌다.

출장을 마치고 다시 도쿄로 돌아가면 어떤 느낌일까.

8/4

쥴네 부부가 도쿄에 놀러왔다.

“차를 타고 어딘가 가자”라고 이야기가 되어 차를 빌리기로 했다. 이번에 이용한 서비스는 Anyca(エニカ)였다. 이 서비스는 말 그대로 자동차의 Airbnb라고 할 수 있다. 흔한 닛산이나 도요타 차종들도 있지만, 주로 고급 차종들 위주로 편성되어 있다. 아마도 Getaround의 일본 버전인 것 같은데, “고급차를 빌릴 수 있다”에 좀 더 치중한 것 같았다. 렌터카 업체에서는 흔히 만나볼 수 없는 포르쉐들이 있었기에 이번에는 큰 맘 먹고 포르쉐를 빌려보기로 했다. 빌린 차종은 마칸(Macan) S, 소형 SUV 라인업의 스포츠 모델인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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렌터카 처럼 특정 위치에서 픽업하는 것이 아니라, 차 주인을 직접 만나 인도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연락을 주고 받는 과정이 필요하다. 나의 경우 딴에는 공들여 정중한 일본어 메시지를 보냈더니 “영어가 더 편하겠네” 하며 주인으로부터 영어가 돌아왔다. 편했지만, 뭔가 더 굴욕적인 느낌…

알고보니 그는 요코하마에 거주하고 있었다. 너무 멀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대화를 시작하고 나니 뭔가 취소하기가 좀 애매했다. 다행히 픽업은 도쿄 메구로에서 가능했다.

인도 과정은 생각보다 번거로웠다. 아무래도 고급 차이고, 오너가 직접 차를 인도하다보니 설명이 이것 저것 필요했다. 이런 부분은 신경써주고, 저런 부분은 어떻게 하면 된다는 식으로. 차를 렌트할 때 보험이 필수이긴 하지만, 아무래도 상처가 나지 않는 편이 양 쪽 모두에게 좋을 것이다. 일단 렌트에 동의하면 면허증을 한번 더 확인하게 된다. 이 경우, 서로가 상대방의 면허증을 찍어 업로드하게 되어 있다. 크로스 체크를 하라는 의미인 것 같다. 그리고는 차에서 내려 스크래치 등을 체크한다. 전면과 후면에 작은 찍힘 몇 개 정도가 있었다. 그리고는 어떤 용도로 쓸 것인지, 얼마나 탈 것인지도 가볍게 물어봤다. 이건 아마도 필수는 아닌 것 같지만, 이번에 만나게 된 오너가 개인적으로 좀 궁금했던 것 같다.

꽤 긴 시간 (15분 정도)이 지나고, 드디어 오너가 차에서 내렸다. 그는 뭔가 내가 미덥지 못한듯 한참을 차 뒤에 서 있었다. 물론 내가 나에게 뭔가를 빌려줘도 그런 심정이었겠지만, 서류 작업 조금 하면 바로 차를 빌릴 수 있는 렌트카보다는 조금 더 귀찮고 마음이 쓰이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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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이런 저런 주의사항을 들은 터라 아무래도 좀 조심스럽게 몰게 되었다.  일본의 자동차는 기본적으로 우핸들이다. 위치가 반대이기 때문에 레버의 위치도 다들 반대다. 덕분에 깜빡이 레버를 켠다는 것이 와이퍼를 켜는 일이 꽤 빈번하게 일어난다. 나는 그래도 어느 정도는 적응이 되어 실수가 좀 준 편이다. 그러나 이 차는 독일차라서 그런건지, 우핸들임에도 불구하고 레버의 위치가 좌핸들과 동일했다. 따라서 모든 학습이 리셋, 좌회전/우회전을 할 때마다 와이퍼가 켜지는 부끄러운 일이 벌어졌다.

왜 이렇게까지 친구 부부에게 정성을 다하는지 나도 알 수는 없지만, 나는 하네다 공항까지 차를 몰고 말 그대로 게이트 앞에서 그들을 기다렸다가 숙소까지 모시고 갔다. 아마도 이 정성을 쏟을 여자친구가 없기 때문이겠지… 원래는 이 차를 몰고 후지산까지 가기로 했지만, 할 일이 생기는 바람에 휴가를 내지 못해 다음 날 가볍게 근교를 다녀오기로 했다.

우리는 차를 대충 몰아 가마쿠라로 향했다. 이번에는 신요코하마에 새로 난 도로로 잘못 빠지는 바람에 (네비게이션에도 반영되지 않은 완전히 새로운 길이었다) 시간이 좀 더 걸리긴 했지만, 그럭저럭 무난하게 여행을 다녀올 수 있었다. 후덥지근한 여름의 해변을 조금 걷는 게 전부인 여행이었지만.

차 이야기를 거의 안했는데, 아마도 내가 운동 성능이나 차의 기능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전까지는 주로 BMW를 몰았는데, 이 브랜드를 가장 좋아하는 이유는 아무래도 갈 때 확실히 잘 가고, 설 때 잘 선다는 것이다. 이 차를 몰면서도 비슷한 인상을 받았다. 운동성능은 SUV라는 것이 믿겨지지 않을 만큼 기민했고, 코너 등에서도 꽤 안정적이어서 모는 재미가 있었다. 편의 기능도 잘 구비되어 있었고 (하지만 이건 현대 기아차가 훨씬 좋을지도…) 인테리어도 고급스러웠다.  마음에 드는 부분도 많았지만, 또 빌릴 생각이 들 것 같지 않다. 오히려 일본의 도로환경에서 이 차의 덩치는 거추장스러울 뿐이었다. 가끔 좁은 도로에 접어들면 혹시나 나뭇가지에 스크래치라도 나지 않을 지 긴장을 바짝하게 되는 등, 빌리는 차로서는 그다지 좋은 점이 없었다.

반납 과정은 꽤 간단했다. 정해진 시간에 차를 가져다 놓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다만 반납 장소가 요코하마였기 때문에 돌아오는 길이 꽤 길었던 것이 문제였을 뿐. 심지어 돌아오는 길에는 비 마저 추적추적 내려 신분 하락의 씁쓸함이랄까, 열패감을 더했다(우리는 의외로 포르쉐를 흠뻑 즐겼던 것이다). 다행히 마음씨 좋은 주인이 우산을 줘서 비를 피할 수는 있었다.

이후로 차를 몇 번 더 빌렸지만, 애니카 대신 오릭스 카 셰어링을 이용하고 있다. 내가 이 서비스를 더 이용하지 않는 이유는 1) 주인과의 불필요한 메시지가 너무 많다 2) 대여 과정이 지난하다 3) ‘남의 차’라는 느낌 때문에 운전할 때 너무 조심하게 된다 정도인 것 같다. 포르쉐를 저렴한 가격으로 몰아보고 싶다면 한번쯤은 괜찮지 않을까 싶기도 하지만, 나는 그렇게까지 포르쉐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굳이 그걸 위해서 저 과정을 거치지는 않을 것 같다.

 

 

7/30

어제는 일찍부터 차를 빌려 쇼난 해변을 가기로 했다. ‘왜 하필 쇼난인가…’ 라고 묻는다면 딱히 이유는 없었다. 료마의 추천이 있기도 했고, 목적은 그냥 일본에서의 운전에 익숙해지기 위함이었기 때문이다. 지도 앱에서 검색을 해 보니 한시간 반 정도가 걸리는 것으로 나왔다.

오전에 친구 조나선을 만나 일본을 떠날 때 주었던 선풍기를 돌려받기로 했다. 나도 굳이 필요가 없는 물건이지만, 그 역시 한번도 틀지 않았다고 해서 짐을 치워주는 느낌으로 도로 받아왔다. 그는 얼마 전 아자부다이(麻布台)에서 하츠다이(初台)부근으로 이사했는데, 운전을 해서 가는 김에 그의 집에 가서 선풍기를 받아오기로 했다. 초행길이기도 하고, 굉장히 좁은 골목이 많은 길이라 멀찌감치 차를 세우고 조나선의 집으로 갔다. 날은 굉장히 더웠고, 동네는 아기자기했다. 마치 일본 애니메이션 어느 장면에서 본 듯한 골목길의 연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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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도착했는데 조나선도 딱히 할 일이 없다고 해서 나의 즉흥 여행에 동참하기로 했다. ‘커피만 한잔 마시고 돌아올거야’ 라는 말에 그는 어깨를 으쓱 하고는 군소리 없이 따라왔다. 운전하는 길은 그야말로 실수 연발이었다. 폰 배터리는 일찌감치 다 되었고, 차량 내비게이션을 따라가야 했는데, 출구를 몇 번이나 잘못 빠져나갔다. 그도 나의 사정을 대충 눈치 챈듯 옆자리에서 적극적으로 길찾기를 도와주었다. 우리는 예정된 한 시간 반을 훌쩍 넘겨, 두 시간 반이 다 되어서야 쇼난 어디께의 리조트에 도착할 수 있었다.

높게 솟은 야자나무와 약간 오래된 듯한 느낌의 리조트가 묘한 정취를 자아냈다. 하와이에서 보았던 동네와 비슷한 느낌도 있었다. 의외로 꽤 손님이 있는지 여기저기서 사람을 볼 수 있었다. 사진에서 찾아본 바로는 날씨가 맑은 경우 후지산이 보이는 것 같았지만, 우리가 간 날은 안개가 잔뜩 껴서 멀리 있는 것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해변을 따라 걸으며 시덥지 않은 이야기를 했고, 이윽고 한 카페에 들어갔다. HOA Cafe라고 하는 곳인데, 정말 우연히 들어간 곳이었지만 도넛이 굉장히 맛있었다. 소시지가 든 프레즐 풍의 도넛이었는데, 단 맛은 전혀 없고, 담백한 빵에 쫄깃한 소시지가 씹히는 맛이 일품이었다. 커피 역시 적절히 쓴 맛에 아주 시원했다. 우리는 커피를 시켜놓고 앉아 최근 본 영화 이야기를 했다. 나는 최근에 본 영화가 별로 없어서 얼마 전 무민 TV판을 보다가 졸았다는 이야기를 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는 나에게 울버린 영화를 추천해 주었다. 예전 집 근처 절에서 난투극이 벌어진다나. 좋아하는 절인데 거기서 피가 낭자한 폭력이 벌어진다니, 그다지 유쾌하진 않았다.

가볍게 커피를 마시고 바로 돌아가기로 했다. 비도 올 것 같았고, 저녁까지 여기 있을 이유도 별로 없었다. 도쿄로 올라가는 길엔 그가 음악을 틀었다. 우리는 가는 내내 음악 이야기를 했다. 그는 클래식이나 R&B를 변주해서 루프를 하는 음악을 즐겨 듣는데, 어떤 트랙은 40분짜리도 있다고 했다. 비가 쏟아지는 와중에 들으니 꽤 운치가 있었다. 흥미를 보이니 평소에 즐겨 듣는 여러 앨범을 공유해 주었다. 일하며 듣기에 딱 좋은 음악들인 것 같다.

조나선을 내려다 주고 나니, 음악을 틀 방법이 없어졌다. 빗소리를 들으며 조용히 차를 몰아 돌아갔다. 그것도 나름 나쁘진 않았다. 아침에 듣던 클래식 음악이 생각났다. 최근에 갑자기 슈베르트를 듣기 시작했는데, 아직도 뭐가 무슨 트랙인지 전혀 모르겠지만, 내가 좋아하는 종류는 아마도 피아노 즉흥곡인 것 같다. D899의 3번 트랙이 제일 마음에 든다. 아침 저녁에 TV를 보는 대신 이 음악을 튼다. 허세를 부린다고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이 집에선 어쩐지 그래야만 할 것 같다.

이제 곧 이사를 간다. 지금보다는 좀 좁아질테지만,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7/29

jacopast님과 4개 메신저를 넘나드는 채팅 중 문득 이상적인 카메라 조합에 대해 떠올려 보았다. 여러가지 조건이 있겠지만, 곰곰히 생각해 보니 나는 아래의 요건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다.

  • 외관 : 최근 나오는 미래 지향적인 디자인이나, DSLR의 디자인은 선호하지 않는다. 가장 좋아하는 것은 라이카 M 등의 레인지파인더 디자인, 혹은 콘탁스 aria라이카 R6 같은 조금 소형의 SLR 카메라 디자인을 좋아한다. 이것이 최 우선 순위이다. 무엇보다 예뻐야 한다. 사이즈는 무조건 작아야 한다. 라이카 M 정도의 사이즈를 가장 좋아하는데, 그 보다 조금 더 작으면 너무 장난감 같고(라이카 CL), 더 크면 좀 둔해보인다(콘탁스 G). 이런 의미에서 니콘 S 역시 마음에 든다.
  • 판형 : 35미리(혹은 풀 프레임)을 좋아하는데, 사실 중형도 늘 궁금해 하고 있다. 롤라이플렉스로 찍은 사진을 보면 괜히 검색을 하게 되지만, 늘 구입하지 않는 이유는 아마도 위에 적은 외관 때문일 것이다. 롤라이플렉스의 긴 카메라 디자인은 아름답지만, 내가 원하는 폼 팩터에 비하면 조금 크다. 핫셀블라드 역시 마찬가지이다. 35미리 이하의 포맷은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데, 뭐랄까, 결국 특별히 차이가 없다는 것은 머리로는 알지만 괜히 손해를 보는 느낌이다.
  • 무게 : 무게도 굉장히 중요하다. 일단 메고 다니는 데 최대한 덜 걸리적거려야한다. 수년 전 오사카로 5d mk2와 35미리 렌즈를 메고 다닌 적이 있었는데, 며칠 지나니 사진이고 뭐고 길바닥에 버려두고 가고 싶을 정도였다. 빌린 카메라라 그럴 수는 없었지만, 그 이후 뛰어난 이미지 품질에도 불구하고 캐논 DSLR을 살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 렌즈 : 대부분은 렌즈 교환식이기 때문에 렌즈 역시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나는 렌즈의 디자인을 너무도 중요하게 여긴다. 길이랄지, 렌즈에 찍힌 거리계나 조리개 숫자의 폰트, 그리고 코팅의 색깔 등은 내가 찍는 사진과 전혀 무관하지만 매우 신경이 쓰이는 부분이다.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렌즈는 라이카의 35미리 즈미룩스이다. 난 지금은 구형 35미리 즈미크론을 가지고 있지만, 아무래도 너무 짧고 작다. 400만원에 육박하는 렌즈를 구매할 자신이 없어 선택한 대안이라 더욱 미워보일지도 모르겠다. 이외에도 콘탁스의 플라나 50미리 렌즈, 혹은 소니 용으로 나온 같은 자이즈 계인 록시아 렌즈군 역시 매우 좋아한다.
  • 작례 : 사진을 잘 못 찍기 때문에 남이 찍은 결과물에 크게 좌우되는 편이다. 누군가 좋은 사진을 특정한 카메라로 찍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그 카메라에 꽂히게 된다. 세바스티앙 살가도가 라이카 R로 대부분의 작업을 했다는 것을 알고 R5와 즈미크론 50미리를 구해 들고 다녔다. 결과물이 같을 리는 없지만, 그 작례들은 이 카메라로 낼 수 있는 최대의 퍼포먼스를 암시한다고 해야 할까. ‘아, 이 정도는 해낼 수 있는 거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 구입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하여튼 카메라 구입 전에 플리커 (최근엔 인스타그램) 에 렌즈와 카메라 정보를 입력하는 것이 일이 된다.

나에겐 현재 라이카 typ 240과 sony의 a7이 있다. 거의 같은 결과물을 내는 두 가지의 카메라를 (그것도 비싼) 가지고 있을 이유가 없기에 하나는 처분할 생각이다. 아마도 typ 240을 처분하고 소니 카메라로 라이카 렌즈들을 사용하게 될 것 같다. 나의 typ 240은 런던에서 구매한 물건으로, 구매 당시 말 그대로 온라인에서 점원의 적극적인 판촉 활동에 넘어가 얼떨결에 결제를 한 엄청난 충동 구매 물품이다.

사실 디지털 레인지파인더에 대한 환상 같은 것이 좀 있었는데, 막상 구매하고 나니 이전에 가지고 있던 sony a7보다 그다지 결과물도 나을 것이 없고, 무엇보다 순 매뉴얼이라는 것이 너무도 불편했다. 가끔 찍는 카메라라면 납득이 가겠지만, 이 카메라 한대로 모든 촬영을 한다는 것은 무리하게 느껴졌다. 게다가 쓸데없이 비싸다.

하지만 라이카 카메라로 얻을 수 있는 허영의 만족은 포기할 수 없기에, 아마도 노출계마저 없이 단촐한 라이카 M4 정도를 들여 눈요기를 하려 한다. 그러니 결국은 카메라를 또 사겠다는 이야기가 되는군.

7/25

이번 도쿄 생활에서의 가장 큰 숙원 사업이었던 “일본에서 면허따기”를 드디어 실행에 옮겼다. 많은 서류가 필요했다. 필요한 서류는 아래와 같다.

  • 한국 면허증 – 갱신기간이 도래하지 않은, 유효한 면허증
  • 한국 면허증에 대한 번역 공증 – 번역을 직접! 해야 한다. 물론 잘못된 것 정도는 고쳐줌.
  • 출입국 기록 – 면허를 발급 받은 시점 이후 90일간 해당 국가에 거주해야 한다.
  • 운전면허 경력 증명 – 면허증 재발급을 받은 경우, 경력 증명서를 첨부하는 편이 안전하다.
  • 한국 여권
  • 재류카드
  • 주민표 – 구약소에서 100엔에 발급
  • 사진 1매 – 만일 없으면 면허시험장에서 800엔에 촬영 가능

한여름에 땀을 뻘뻘 흘리며 서류 작업을 완료했다. 평소 성격 같다면 대충 읽어보고 몇번 퇴짜를 맞았겠지만, 이번엔 제대로 처리해서 한번에 통과하고 싶었다. 시간을 들여, 몇번을 확인해 가며 천천히 진행했다.

서류를 완비하고, 고토 구(江東区)에 있는 면허시험장에 방문했다. 고토 구는 오래된 아파트들이 많고, 롯본기에 비하면 조금은 낙후된 인상이었다. 면허 시험장 역시 꽤 오래된 건물이었다.

서류를 소중히 감싸안고 창구 주변을 서성이니, 아직 접수 시간이 아니라고 해서 벤치에 앉았다. 내 옆에는 나와 비슷한 외국인이 두명 더 앉아있었다. 딱히 번호표를 뽑는 기계 같은 것이 없기 때문에, 말 그대로 줄을 서는 시스템이었다. 한시가 되자 다들 일사 분란하게 줄을 섰다. 나름 서로 온 순서를 봤는지, 그 순서 그대로 줄을 섰다. 새치기란 것은 아예 생각할 수 없는 분위기.

처음엔 준비한 서류를 체크한다. 전부 가져왔는지, 정말 유효한 면허증인지에 따라 진행될 수도, 퇴짜를 맞기도 한다. 나 같은 경우 가져간 사진이 규격에 맞지 않았다. 잘라내야 하는데, 잘라내면 눈코입만 나오는 사진이 되기 때문에 새로 찍으란 말을 들었다. 어떤 사람은 재발급 받은 면허증을 가져갔는데, 그 경우 경력 증명서가 없으면 90일 이상 해당 국가에 체류했는지 확인이 안되기 때문에 진행을 할 수가 없다. 그 사람은 애석하게도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일본의 공공기관에서 긴장을 하는 경우는 좀처럼 없는데, 이런 실패 사례들이 조금씩 보이자 모두 긴장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나도 그랬지만, 다른 사람들 역시 서류 준비를 길게 했을 것이기 때문에 한번의 실패도 뼈아플 것이다. 만일 경력이 증명되지 않으면 초심 면허를 발급받는데, 이 경우 차를 빌릴 때나 보험 측면에서 여러모로 불리하기 때문에 (심지어 1년 동안 초보운전 표시를 의무적으로 달아야 한다) 한번에 제대로, 경력도 완전히 인정받는 편이 좋다. 미국의 DMV까지는 아니지만, 모두 담당자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며 긴장을 바짝 하는 모습을 보였다.

서류에 별 문제가 없다면 다시 자리에 앉아 조금 기다려야 한다. 몇 번인가 다시 불러 미비한 점을 보완한다. 그렇게 작업이 완료되면 접수증을 받게 되고, 인지를 산다. 인지대는 면허 종류에 따라 다르다. 나는 보통 면허였는데, 이 경우 4,250엔이 든다. 2톤 이상의 자동차는 운전할 수 없다.

돈을 내고 나면, 시력 검사를 한다. 안경을 쓴 경우 안경을 벗었다 썼다 하며 시력을 체크한다. 나의 경우 나안으론 아무것도 보이지 않기 때문에 안경 착용 필수 조건이 붙었다. 시력은 동그라미에 뚫린 구멍의 방향을 이야기하는 형식으로 체크하는데, 나는 하필 처음 본게 오른쪽에 난 구멍이라 “C…입니다” 라고 했다가 면박을 당했다.

모든 것이 완료되면 정식 접수증이 나온다. 이 때 비밀번호를 설정(후에 활성화시킬 때 중요하다)하고, 발급만 기다리면 된다. 각 과정이 굉장히 느리게 진행되기 때문에 여기까지 오는데도 세 시간 정도가 걸렸다. 이후 면허증이 나오는데까지 최대 한시간까지 걸린다고 하니 얼마나 천천히 진행되는지 알 수 있다.

시간이 좀 뜰 것 같아 시험장 내에 있는 식당에서 가라아게 정식을 먹었다. 양상추 샐러드가 좀 눅눅했던 것을 빼면 닭튀김 자체는 먹을만 했다. 된장국이 간이 잘 되었다.

밥을 먹고 나니 의외로 바로 면허를 받을 수 있었다. 아마도 30분 정도가 걸린 것 같았다.

면허를 받은 후 이사를 하게 되면 반드시 경찰서나 면허 시험장에서 주소 변경을 해야 한다. 10년 정도 되는 한국 면허증의 유효기간과는 다르게, 3년 안에 적성검사를 다시 치러야 한다. 어쨌든 이렇게 하면 면허 발급 절차가 완료된다.

면허증을 받자마자 카 셰어링 서비스에 등록했다. 주말엔 아마도 차를 타고 교외로 나가게 될 것 같다.

 

7/23

새해 들어 글을 좀 자주 쓰겠다고 다짐했지만, 그 다짐은 그 동안 인생에서 한 수많은 약속과 마찬가지로 지켜지지 않았다. 애초에 그렇게 자주 주제가 떠오를 리가 없다. 매일 매일 새로운 무언가를 생각하려면 품이 든다. 간단하게라도 적다 보면 조금 더 긴 글도 써 볼 수 있지 않을까.

오늘은 에비스 역에서 디자이너 겸 모델을 하는 료마를 만났다. 그는 프랑스에서 나고 자라, 일본 바닷가 마을에서 살다 어느 계기로 디자이너가 되었는데, 아직 21세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가 디자인 한 앱이 앱스토어 베스트 앱이 되는 등, 벌써부터 탄탄한 경력을 자랑하고 있다. 나는 그를 도쿄에서 열린 한 디자인 밋업에서 만났는데, 옆 자리에 앉았던 그와 언제 밥 한번 먹자는 약속을 지킨 것으로 인연을 이어가게 되었다.

이전 같으면 상상할 수 없는 사람들을 여기 와서 만나고 있다. 애초에 나는 그렇게 사교적인 사람이 아니지만, 인생의 어느 시점에선가 더 이상 그 말을 하기 어려울 정도로 모르는 사람을 만나고, 친해지게 되는 일을 많이 하고 있다. 내가 스스로 인식하는 나는, 어쩌면 행동으로 드러나는 나보다 조금 더 느릴 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에비스 역 바로 뒤에 있는 소바 집에 갔다. 냉우동과 토로로 소바, 그리고 모듬 튀김을 주문했다. 국물이 자작하여 면을 젹셔 먹는 수준이었지만, 면은 아주 알맞은 탄력을 가지고 있었다. 게살을 넣어 만든 튀김은 손에 꼽을 정도로 맛있었다. 우리는 나이 차이가 꽤 많이 나고, 그 때문인지 고민을 하는 지점도 꽤 달랐다. 이 블로그에 그 내용을 쓰는 것은 적절하지 않으므로 언급하지 않겠지만, 나는 어째서인지 내가 최근에 가지고 있는 고민들을 그에게 술술 이야기했다. 조만간 도쿄 외곽으로 로드 트립을 가보자는 말을 하고, 우리는 커피숍에서 헤어졌다.

내일이면 새로운 임시 숙소로 옮긴다. 짐 정리를 마치니 막 도쿄에 도착했을 때 보다 조금 가방이 늘었다. 컴퓨터 박스, 카메라 가방 등에 여기 와서 구입한 책들도.

캘리포니아를 떠난 지 이제 한달이 되었다.

나는 어떤 대통령을 원하는가

최순실 국정농단의 폭풍이 휘몰아치기 몇 주 전의 일이다. 울산에는 기록적인 폭우가 왔고, 그 결과 한 마을에 6명의 주민이 고립되고 만다. 소방대원이 급히 출동하여 구조에 성공하였으나, 폭우로 인해 급격히 불어난 강물이 대원 중 한명을 덮치고 만다. 실종된 대원의 이름은 강기봉, 그는 결국 실종 11시간만에 시신으로 발견된다.

유튜브를 보다 우연히 마주친 이 영상에선, 빈소에 방문한 문재인 전 대표의 모습이 보인다. 그는 침통하게 빈소를 지키는 대원들의 손을 잡고, 그를 마주친 대원들은 끝내 울음을 터뜨린다. 문재인은 한참 동안 대원을 위로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참을성 있게 듣는다. 눈을 이따금씩 꿈뻑이며, 그는 그렇게 별다른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듣기만 한다. 

우리가 지난 정부에서 잃은 것은 무엇인가. 그토록 박 대통령에게 분노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어쩌면 우리가 분노한 것은 아이들이 바다에 빠졌을 때, 그리고 그들이 천천히 그 차가운 물 속에서 죽어갈 때, 그들을 구하지 못한 무능함이 아닐지도 모른다. 차갑게 식어버린 자식들 앞에서 오열하는 부모들의 손 한번 잡지 않고, 청와대 앞까지 찾아온 그들을 무시해버린 몰인정함, 비인간성에 분노한 것이 아닐까. 미안하다 한마디를 안하고 “뭐 이렇게 바라는 게 많냐” 며 핀잔을 주던 그녀 옆의 정치인들에 화를 내었던 것은 아닐까. 나라를 이끄는 사람들이 나라에 사는 사람을 돌보지 않는 것에 절망한 것이 아니던가.

문재인은 당시 화려한 공중파 촬영팀을 대동하지도 않고, 단촐한 보좌진과 함께 빈소에 왔다. 그를 찍는 카메라는 빈소에 있던 누군지도 모를 – 아마도 소방대원 중 하나이리라 – 사람의 핸드폰 카메라가 전부였다. 

“정치하는 사람으로서 면목이 없네요”.

그가 왜 사과를 해야 하는가. 그 자리에 왔어야 하는 사람은, 사과를 해야 하는 사람은 대통령이 아니던가. 거기서 나는 그렇게 생각을 했다. 유능한 정부 같은 건 됐다. 정치인 그놈이 그놈이다, 알고보면 다 똑같다고 했던가. 하지만 그게 겉치례라고 하더라도 적어도 누가 목숨을 잃었을 때 그들의 가족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면목이 없다”고 사과할 수 있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야 하는 게 아닌가.

살펴보니 문재인은 참 여러 곳에 갔었다. 서문시장 화재현장, 울산시장 태풍 피해현장, 밀양 송전탑, 강남역 추모현장, 그리고 세월호. 한 두번은 할 수 있다. 하지만 진심이 없다면 이렇게 오랫동안, 일관되게 할 수는 없다. 단지 최근 4-5년의 일만이 아니다. 그의 인생이 계속 그러했다. 그는 35년을 인권 변호사로 일했다. 27년 전에 있었던 사건의 의뢰인 이름을 아직도 기억하고, 그들에게 “미안하다”고 할 수 있는 사람.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달변도 아니고, 미국의 여느 정치인들처럼 PC하지도 않은 그다. 최근에 그의 동성애 발언에 대해 큰 실망을 했고, 그 이후의 해명으로도 썩 후련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난 치열한 대선 토론의 모습보다 대통령 선거도 최순실도 없었던 어느 10월의 장례식장의 그를 더 무겁게 기억하기로 했다. 광화문 천막에서 유민아빠 옆에서 같이 단식하던 그를 기억하기로 했다. 지지자들이 내미는 손을 하나하나 거절하지 못해 피멍이 든 그의 손을 기억하기로 했다.

부고

애초부터 그리 친해질 것 같지 않았다. 처음 우리집에 온 날 녀석은 나를 무척 경계했다. 사촌 형 집에서 하도 사납게 굴어서 1년을 못 채우고 우리 집으로 온 터라, 화도 났을 테고 불안했겠지. 나는 종종 간식을 들고 친해져보려고 노력했지만 인내심이 그리 깊진 못한 터라 결국 늘 실패로 돌아갔다. 취직하여 일이 바빴던 나는 결국 이 녀석과 친해지는 것을 포기했다. 녀석도 그리 협조적이진 않았다. 회사에서 늦게 퇴근하면 어김없이 사납게 짖었고, 이웃에서 불평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터라 눈치없게 짖는 이 개가 난 그리 맘에 들지 않았다.

우리는 그리 잘 어울리지 못했다. 하지만 이 친구는 내가 자고 있을 때 가만히 내 앞에서 내가 자는 모습을 보곤 했다고 한다. 내가 기억하는 건 내 침대에 올라와 거칠게 나를 깨우는 발길질 뿐이었지만. 나에게 사납게 짖기 전, 밤늦게까지 현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들은 건 우리 사이가 틀어졌다고 생각한 지 꽤 오래 된 이후의 일이다. 며칠 동안 출장을 갔을 때엔 괜히 내 방을 서성였다고 한다. 괜히 내 옷에 배인 내 체취를 맡거나, 내 물건들을 건들거나 하는 식으로 나를 궁금해 한 것 같다. 하지만 난 ‘나를 아예 남으로는 생각하지 않는구나’ 정도로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는 늘 서로에게 데면데면했다.

부모님은 무뚝뚝한 나 대신 녀석의 재롱을 보며 즐거워 하셨다. 녀석도 부모님을 잘 따랐다. 세 가족은 아주 친밀해졌고, 나는 그렇게 녀석은 물론 부모님과도 조금씩 거리를 두게 되었다. 나이를 점점 먹어가며 집은 잠만 자는 곳으로 여기게 되었고, 이윽고 해외 취업을 핑계로 부모님의 품을 떠나버렸다. 2시간 떨어져있는 도쿄를 넘어, 어느새 난 하루 가까이 시차가 나는 미국으로 와 버렸다. 처음 집을 떠날 때 배웅하러 온 녀석이 이상하게 울었던 것을 기억한다. 내가 멀리 떠나는 것을 알았던 것일까, 출국 심사장을 들어가는 나를 보며 뭐라 말하듯 크게 짖어대었다. 나는 쏠리는 시선이 부끄러워 발길을 재촉할 뿐이었다.

부끄럽게도 나는 함께 산책을 나간 적이 거의 없다. 내가 몸에 손을 대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린 시절, 딱 한번 산책을 나간적이 있다. 부모님이 여행을 가고, 우리 둘만 집에 남았을 때 나는 멋쩍게 그녀석에게 목줄을 들이밀었고, 녀석은 못이기는 척 목줄을 했다. ‘내심 산책은 가고 싶은거구만’ 하고 생각했다. 우리는 아파트 주위를 한바퀴 돌았다. 녀석은 처음엔 가만히 서있다가, 그 다음은 어디로 가야 하는지 갈팡질팡했지만 이윽고 우리는 가볍게 아파트 단지를 돌게 되었다. 낯선 사람들이 “강아지 참 이쁘다” 며 다가올 때 내 뒤로 숨는 녀석을 보며 묘한 유대감을 느꼈다. 그것이 우리의 유일한 산책이었다.

녀석은 꼬박 9년을 살았다.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반려동물의 시간은 사람의 시간보다 빨리 간다. 녀석의 이름은 리치다. 부잣집에서 자라라고 지어준 이름이라고 하지만, 그리 부잣집에서 살진 못했다. 하지만 풍족한 사랑을 받았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생을 마감했다.

리치는 2017년 2월 24일에 심장마비로 사망했고, 유해는 화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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